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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에 진짜 향을 피워봤습니다 <발굴왕>
2019-10-31 13:01 문화

※김상운 기자가 진행하는 대한민국 최초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서 흥미로운 고고학 이야기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VtIuxPqLDw&t=27s



물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 불교의 세계와 도교의 세계가 위 아래로 결합된 '백제금동대향로'. 문화재청 제공
백제 정신문화 함축한 걸작
백제금동대향로는 지금껏 출토된 모든 백제 금속유물들 가운데 예술성이나 학술적 의미에서 단연 세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국외 반출이 금지된 문화재로 지정돼 지금껏 한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 향로는 백제 후기의 역사문화 해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고학계는 백제 말기인 사비시대에도 문화예술이 고도로 융성한 사실을 금동대향로가 보여줬다고 평가합니다. 종래는 백제의 공예기법이 무령왕릉이 조성된 웅진시대에 절정에 달한 뒤 사비시대부터 점차 쇠퇴한 것으로 봤습니다. 향로는 정치적 쇠퇴가 꼭 문화적 쇠퇴로 직결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 61.8㎝, 무게 11.8㎏으로 일본이나 중국 향로를 통틀어도 대형에 속합니다. 고대 중국의 도교사상을 표현한 박산(博山․중국 전설에 신선이 산다는 바다 가운데 산) 향로의 모티브와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표현 방식이나 크기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국과 일본 학계를 중심으로 중국 남조에서 제작된 수입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백제에서 만든 공예품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은 이유죠. 일각에서 비교적 커다란 크기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솜씨가 일품이라 당시 선진 문화였던 남조의 물건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2007년 부여 왕흥사지에 이어 2009년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고도의 공예기술로 제작된 사리기가 잇달아 출토되면서 백제 제작설에 힘이 실렸습니다.

금동대향로의 뚜껑 부분. 꼭대기에 달린 봉황의 자태가 날렵하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꼭대기에 봉황이 달린 향로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다섯 겹에 걸쳐 죽 이어져 있습니다. 봉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활을 쏘는 무사부터 머리를 감는 선인(仙人), 각양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樂士)들까지 총 18명의 인물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또 호랑이와 사슴, 사자, 반인반수(半人半獸) 등 65마리의 온갖 동물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죠. 향로를 손수 발굴한 신광섭 전 국립부여박물관장이 꼽는 백미는 향로 전체를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용 장식입니다. 신 전 관장은 “역동적인 용틀임은 누가 봐도 힘이 넘친다. 특히 용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은 ‘연화화생(蓮華化生·연꽃에서 만물이 탄생한다는 세계관)’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학계는 이 향로가 백제의 양대 사상체계, 즉 도교와 불교의 공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분석합니다. 뚜껑 부위에 새겨진 산이며 악사, 선인을 묘사한 화려한 장식은 도교의 이상향을 상징하며 그 아래 받침대에 새겨진 연꽃은 불교 사상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천상을 상징하는 봉황과 물의 세계를 뜻하는 용이 위, 아래로 배치된 것도 절묘합니다.

금동대향로 출토 직후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발굴단 보고서에 따르면 향로는 공방 건물 안 굴뚝 근처의 나무수조 안에서 발견됐습니다. 향로가 나온 웅덩이에는 기와와 토기조각, 옥, 금속제품이 잔뜩 들어있었습니다.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박살이 난 기와가 수조 안에 섞여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와 관련해 귀한 향로가 사찰 핵심건물이 아닌 공방 수조에 묻힌 까닭이 궁금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상상의 영역입니다. 통상 유물이 맥락 없는 곳에서 출토될 때 고고학자들은 매납(埋納․의도적으로 유물을 묻거나 숨겨놓는 행위) 가능성을 검토합니다. 더구나 주변에서 건물이 급작스럽게 붕괴된 흔적이 발견됐다면 유력하게 떠오르는 가설은 전시나 화재와 같은 비상상황입니다. 다시 말해 삼국시대 말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을 당시 침략군으로부터 향로를 지키려고 한 누군가가 공방 수조에 이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이죠. 불당이나 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는 공방에 시대의 보물을 감춰두려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금동대향로 출토 사실을 비중있게 보도한 1993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 지면.

정치가 개입한 향로 공개
문화체육부로부터 향로 발견 사실을 보고받은 당시 YS 청와대는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정 타결로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 거센 터여서 일종의 ‘물 타기’ 호재로 이용하려고 한 것이죠. 통상 발굴현장 언론공개회는 문화재위원을 비롯한 학계 전문가들 위주로 참석하기 마련인데, 이때는 이례적으로 이민섭 문화체육부 장관이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지역 언론인 대전일보가 언론공개회 하루 전 향로 발굴사실을 특종 보도했지만, 폭설로 신문 운송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가판에만 관련 소식을 짧게 소개하는데 그쳤습니다. 조선일보 문화부 오중석 기자는 문체부 장관의 발굴현장 방문 소식을 미리 입수하고 하루 전 부여에 도착했습니다. 장관이 직접 행차할 정도면 대단한 유물이 나왔을 것이라는 직감이 작동한 것이죠. 그런데 정작 장관은 도착 예정시간을 세 시간이나 지난 이튿날 오후 2시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장관을 실은 버스가 눈 쌓인 차령산맥을 넘지 못해 조치원 방향으로 돌아오느라 지체된 겁니다. 그 사이 다가오는 마감시간에 애가 닳은 기자들이 발굴단에 강하게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문체부 공보관실은 “신문 1면에 넣지 않으려면 오지도 말라”고 기자들에게 공지할 정도로 향로 띄우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정부 예상대로 향로 발견은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발굴 다음 달인 1994년 초 YS가 충남지역을 순시하면서 특별히 능산리사지 발굴현장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YS는 여러 기관장들 가운데 부여박물관장을 찾더니 “유적 보존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1억 원이 넘는 발굴비용이 즉각 책정됐습니다.

정부의 높은 관심이 늘 플러스 효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질적인 부처간 신경전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갈등이 그것. 어느 날 신 전 관장은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허가된 발굴기간(1993년 12월 5일 종료)을 넘겼으니 지체보상금을 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통상 중요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면 발굴기간을 늘려주는 관례에 비춰보면 대단히 이례적인 조치였죠. 언론공개 직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사진과 보고서를 올려 보내면서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지 않은 게 일종의 괘씸죄로 작용했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발굴단은 이듬해 겨울에도 비닐하우스로 능산리 유적을 덮은 채 발굴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김상운 동아일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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