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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 시그널]성범죄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 대법원의 두 판결
2024-02-22 12:03 사회

[법조 시그널]은 채널A 법조팀의 온라인 코너입니다. 2분 짜리 방송 리포트에 다 담지 못한 취재 뒷 얘기와 해설을, 때로는 기자의 주관을 담아 전하는 ‘법조 에세이’기도 합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의의 여신상. 저울은 공정, 법전은 정의를 의미한다. (뉴시스)

형사재판은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해야 하지만, 동시에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진실을 발견할 의무’와 ‘피고인의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동시에 지는 법복의 무게는 그래서 무겁습니다.

지난 1월, 대법원은 성범죄 처벌에 관해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자폐성 장애가 있던 남성이, 부산의 한 지하철에서 여성과 신체접촉을 했다가 강제추행으로 기소된 사건입니다. 1,2심은 유죄 판결했지만 대법원은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무죄 판결이었습니다.

이 판결이 주목받은 이유는 2018년 대법원이 내놓은 ‘성인지 감수성 판결’의 한계를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성범죄 피해자 진술을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되지만, 못지 않게 억울한 사람이 나와선 안 된다는 원칙을 확인한 판결입니다.

◆“피해자 진술 증명력에도 한계”…성인지 감수성 판결 선 그어

 이번 판결의 주심을 맡은 천대엽 대법관. 천 대법관은 법원 내에서도 손꼽히는 형사법 전문가다. (뉴시스)

이번 판결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가 항목’에서는 성범죄에서 피해자 진술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일반론을 다룹니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이 사건 피고인을 처벌하는 게 맞느냐는 구체적 사건은 ‘나 항목’에 판단을 적었습니다.

이 판결이 주목받는 이유는 ‘가 항목’ 때문입니다. 대법원 고위 관계자는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성인지적 관점’의 의미와 한계가 쟁점인 사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피고인이 자폐를 앓고 있는 특수한 사례에만 적용할 수 있는 판결이 아니란 겁니다.

실제 판결문에선 2018년 ‘성인지 감수성 판결’ 사건번호를 기재해 인용하며 ‘함부로 남용해선 안 된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대법원 판결로선 파격적인 문구를 써가며 조목 조목 쟁점을 짚었습니다.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하거나,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피해자 진술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는 기준을 설정한 판결입니다. 하지만 이 판결 이후 진술만으로 유죄가 선고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변호사업계는 물론 법원 내에서도 무죄추정의 원칙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피해자 진술, 주관적 평가나 의견도 섞여”…증거 인정 신중해야

 대법원 대법정.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이 함께 판결을 선고하는 장소다. (대법원 제공)

대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성인지 감수성’ 선례가 폭넓게 인정돼선 안 된다고 지적한 대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설령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범죄사실에 의심이 있다면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
2. 성범죄 사건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해야 하지만,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무제한 인정하거나,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3. 피해자도 자신이 경험한 부분에 한정해 진술하며, 여기에는 자신의 주관적 평가나 의견까지 포함될 수밖에 없다.
4. 따라서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사건에서는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경우가 아니라면 피고인의 이익(무죄)으로 판단해야 한다.

여기까진 이 사건에서 기소된 ‘자폐 장애인’과 무관하게, 성범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일반론’적인 기준을 제시한 겁니다.

◆‘진술만으로 유죄’ 제동… 실제 재판에 어떤 의미?

 대법원 청사 중앙현관 입구 전경. ‘자유, 평등, 정의’ 헌법 이념이 각인돼 있다. (대법원 제공)

일부에선 이 판결이 ‘당연한 법원칙’을 선언했다거나, 새로운 판결을 내놓은 게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대법원이 기존 법리를 바꾸려면, 대법관 13명이 재판하는 ‘전원합의체’를 거쳐야 하는데 이 사건에선 그렇지 않았단 겁니다.

하지만 이 재판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대법원 관계자는 “성인지적 관점의 한계에 관해 논의한 판결”이라고 설명합니다. 2018년에 나온 ‘성인지 감수성’ 판결로 인해 피해자 진술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거나, 무죄 추정의 원칙이 위협받는 상황이 생기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에서 나온 판결이란 겁니다.

애초에 2018년에 나온 ‘성인지 감수성 판결’도 전원합의체에서 새로운 법리를 선언한 게 아니었습니다. 성범죄를 당한 사람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해선 안 된다, 일부 모순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함부로 진술 내용이 거짓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 역시 지극히 원론적인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지 감수성 판결’이 나온 이후 파장은 컸습니다. 대법원 판결은 일선 법원에서 재판 주요 논거로 쓰입니다. 대법원이 ‘피해자 진술을 함부로 배척하지 말라’고 선언하자, 일선 재판부도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진술의 일관성’을 근거로 다른 증거 없이 유죄 판결이 나오는 경우도 증가했습니다. 변호사업계는 물론 법원 내부에서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물러서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실제 한 대법관은 퇴임 직전 부장판사들을 모아놓고 ‘요즘 성 범죄 사건에서 유죄 선고가 쉽게 나오는 경향이 우려스럽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성범죄 사건을 맡은 재판부에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기능을 할 겁니다. 사건에 따라 판사들은 2018년 성인지 감수성 판결 뿐만 아니라, 이번 2024년 판결도 인용해 논거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 진술로 징역 10년→무죄…법원의 딜레마

 2018년 ‘성인지 감수성’ 판결 주심이었던 권순일 전 대법관(뉴스1)

2020년,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보습학원 여성 강사 이모 씨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습니다. 학원을 다니는 남학생 둘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습니다. 1심은 징역 10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물증은 없었고 이 씨가 범행을 부인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진술 신빙성이 매우 높다”며 유죄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피해 학생의 병원 진료기록이 나오면서 반전이 생깁니다. 성폭행 당했다고 한 날, 학생이 병원에 가 있던 게 입증된 겁니다.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징역 10년이 선고될 뻔한 사건이 ‘물증’으로 뒤집힌 겁니다.

물론 반대 사례도 있을 겁니다. 성범죄를 저지른 게 맞는데,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범죄혐의를 입증하기가 어려운 사건이 적지 않습니다. 판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100% 진실을 규명할 순 없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을 함부로 배척하지 말라는 것도, 확신이 서지 않으면 진술만으로 유죄 판결을 하지 말라는 것도 모두 중요한 ‘원칙’이 될 수 있습니다.

◆2018년과 2024년의 대법원

 민유숙 전 대법관이 지난해 12월 서초구 대법원 청사에서 퇴임사하고 있다. 민 전 대법관은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법원 제공)

2018년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번엔 ‘성범죄자로 누명을 쓰는 경우’를 만들지 말자는 데 주안점을 둔 판결이 나왔습니다.

반응은 엇갈립니다. 형사소송법 전문가인 김정철 변호사는 이번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지난 몇 년간 성범죄 사건에서는 형사재판의 원리가 모두 무너져 있었다. 성범죄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실무적으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한 현직 부장판사는 이번 판결을 ‘백 래시(사회 변화에 대한 반발)’라고 우려했습니다. “민유숙 대법관이 퇴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이렇게 빨리 현실화됐다”고도 평가했습니다. 이번 판결을 내놓은 곳은 대법원 2부입니다.

원래는 대법관 4명이 재판을 하지만, 민유숙 대법관이 퇴임하면서 3명의 합의로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민 전 대법관은 젠더법연구회 회장 출신이고, 이번 판결을 한 3명의 대법관은 모두 남성입니다. 특히 주심 대법관은 법원 내에서 손꼽히는 형사법 전문가인 천대엽 대법관입니다.

만약 민 대법관이 현직에 있었다면, 이번 판결은 나오기 어려웠을 겁니다. 대법관 4명이 만장일치가 안되면,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는 ‘전원합의체’로 회부되기 때문입니다.

젠더법 연구회 회장 출신의 민유숙 대법관이 빠진 상황에서, 형사법 권위자인 천대엽 대법관이 주심을 맡아 이번 판결을 내놓은 것은 우리 법원이 빠진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피해자의 눈물과 억울한 피고인의 눈물, 양쪽 모두 외면할 수 없는 건 형사재판을 맡은 판사의 숙명입니다. 2018년 판결이 옳으냐, 2024년 판결이 맞으냐 논쟁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법정에선 검사들은 2018년 판결을 무기로 삼을 것이고, 변호인은 2024년 판결을 방패로 삼을 겁니다. 이 둘을 조화시키는 건 결국 법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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