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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무령왕릉-정지산…‘공주 삼각지대’에 숨은 미스터리?! <발굴왕>
2019-11-07 15:17 문화

※김상운 기자가 진행하는 대한민국 최초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 8회에서 백제 정지산 유적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vq1uBRgC-s&t=29s



정지산 유적에서 발견된 연화무늬 수막새. 궁궐이나 거대 사찰에 주로 쓰이는 기와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주춧돌 없는 기와건물의 비밀
“초석(礎石·주춧돌)도 없는 건물에 연꽃무늬 기와라니….”
1996년 8월 충남 공주시 정지산 유적 발굴현장. 그해 2월 공주~부여를 잇는 도로(백제큰길) 공사에 앞서 구제발굴에 착수한 이한상 당시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현 대전대 교수)가 6개월 만에 연꽃무늬 수막새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대박 예감과 더불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연꽃무늬 기와가 출토되는 삼국시대 건물터는 십중팔구 궁궐이나 격이 높은 사찰일 터. 공주 무령왕릉과 대통사지(大通寺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기와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화려하지만 무거운 기와지붕을 버티려면 기둥 아래에 하중을 분산시킬 수 있는 초석이나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을 놓는 것이 이 시대 건축기술에서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지산 유적에서는 초석이나 적심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죠. 대신 바깥부터 안쪽까지 기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습니다. 사람이 거주하기가 불편할 정도로 기둥의 숫자가 많다는 점이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도대체 이 건물의 기능은 무엇이었는가. 미스터리를 풀 열쇠는 뜻밖에도 인근 무령왕릉 안에 있었습니다. 이 교수는 “정지산 발굴에 들어가기 한 해 전에 무령왕릉 내부를 실측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습니다.

무령왕릉 지석.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 지석에 담긴 힌트
‘병오년(서기 526년) 12월 백제국 왕태비(무령왕비)께서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르고 기유년(529년) 2월 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를 지내며 기록한다(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太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무령왕릉에서는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의 이름과 사망일이 새겨진 지석(誌石)이 발견됐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지석 2개 중 하나에 무령왕비가 죽은 해와 빈전(殯殿·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곳)의 위치, 남편 무령왕과 합장된 날짜가 기록돼 있죠. 백제의 경우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2년 3개월 동안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상례(喪禮)를 치른 뒤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교수는 이 중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렀다(居喪在酉地)’는 문장에 특히 주목했습니다. 다른 지석에 방위표가 그려진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빈전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기준점인 왕궁의 위치는 지석 다른 면에 새겨진 매지권(買地券·죽은 사람이 땅 신으로부터 묻힐 땅을 사들인 증서) 문장을 통해 공산성(公山城)으로 추정했습니다. 이 교수는 지도에 무령왕릉과 공산성(왕궁)을 직선으로 연결한 뒤 다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서쪽)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그랬더니 흥미롭게도 정지산에 선이 가닿았습니다. 정지산 유적이 백제 무령왕비의 빈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마리였죠.

이로써 초석이나 적심이 없는 연꽃무늬 기와 건물에 대한 의문도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이니만큼 사람이 거주하기 불편할 정도로 내부에 기둥이 빼곡히 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제기(祭器)로 주로 쓰이는 장고형(長鼓形) 기대(器臺) 조각들이 여러 개 출토된 것도 빈전일 가능성을 높여줬습니다. 삼국시대 기대는 왕이나 귀족이 묻힌 무덤에 부장됐습니다. 이 중 백제 기대는 5세기 한성백제시대 후기부터 많이 만들어졌는데 웅진 천도 이후부터 기대가 커지면서 장식이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또 짧은 시간 안에 높은 온도로 토기를 구워낼 때 나타나는 초콜릿색 단면도 웅진 천도 이후 제작된 기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죠. 이를 감안할 때 정지산 유적에서 출토된 기대는 웅진 천도 이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대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삼고 서쪽으로 선을 그어 정지산 유적이 백제시대 빈전임을 주장했다. 이한상 교수 제공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사전 지표조사에서 기왓장 몇 개만 발견된 연유로 정지산 발굴조사는 사실 큰 기대감 없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스물아홉 청년으로 공주박물관 학예직 가운데 가장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던 이 교수에게 발굴책임이 돌아간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았죠.

그러나 이 교수는 예사 고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워낙 꼼꼼하고 집요하게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인데다 대학시절부터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할 정도로 각종 고고자료를 섭렵한 그였습니다. 정지산 유적은 1996년 2~12월 10개월 동안만 발굴조사가 진행됐으나 불과 10년 뒤 국가사적으로 지정됐습니다.

처음 정지산에 올랐을 때 이 교수는 해발고도 57m의 정상부(면적 2600㎡)가 과도하게 평평하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자연지형으로 보기 힘든 인위적인 삭평의 흔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적의 입지가 예사롭지 않았죠. 유적에서 남쪽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무령왕릉이 나오며, 웅진시대 백제 왕성이던 공산성을 비롯해 송산리 고분군, 교촌리 고분군이 주변에 산재해있습니다.

김상운 동아일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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