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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깊은뉴스]불길 아닌 국가와 서글픈 싸움
2017-07-18 19:53 뉴스A

공무중 입은 부상, 즉 '공상'을 인정받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소방관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문제는 희귀 질병에 걸렸을 때 질병의 원인을 소방관 본인이 입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까요?

최주현 기자의 더 깊은 뉴스입니다.

[리포트]
어렵사리 계단을 내려가는 노인.

14년 전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화마와 싸웠던 소방관 이실근 씨입니다.

[이실근(62세)/ 전직 소방관]
"출구 앞에서 검은 농염이 뭉게구름 올라오듯이 뭉실뭉실하다가 콱 올라왔어요."

그는 지금 불이 아닌 국가와 싸우는 중입니다.

참사 발생 5년 뒤, 이 씨는 갑자기 소뇌위축증으로 쓰러졌습니다.

신체의 움직임과 감각을 통제하는 소뇌의 크기가 줄어드는 소뇌 위축증은,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희귀질환입니다.

1만 3천 번 넘게 불속에서 사투를 벌였지만 병원비는 고스란히 이씨가 떠안게 됐습니다.

[이실근/ 전직 소방관]
"비통함을 느끼지. 헌신하면서 열심히 인명구조하고 연금 받아서 병원비에 3분의 2는 다 써버리고…"

공상이 인정되면 약값은 물론 수술비와 재활비용까지 지원되고 장애 연금 등 혜택을 받습니다.

하지만 2번에 걸친 심사에서 이씨의 공상 신청은 모두 기각했습니다.

희귀질환과 업무의 연관성을 본인이 입증해야 한다는 법조항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사진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제복 차림의 남성.

3년 전 혈관육종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범석 소방관입니다.

[김정남 / 故김범석 소방관 아버지]
"너는 살아 생전에 최선을 다했고, 불 속에 뛰어들고 물 속에 뛰어들면서 많은 사람을 구했는데…"

[최주현 기자]
"공무상 재해 인정을 받기 위해 소방관 본인이 직접 힘든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소방관이 입증하지 못하고 사망했을 경우엔 남은 가족들이 대신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합니다."

350여 명의 목숨을 구한 소방관 아들의 마지막 부탁.

다름아닌 공상 인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행정소송에서 패소하며 남은 가족들은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5년간 공상 신청을 한 소방공무원은 2천 2백여 명.

이가운데 탈락한 12%는 대부분 희귀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1차 심사를 맡은 공단 측은 공정한 심사였다고 주장합니다.

[공무원연금관리공단 관계자]
"공무와 인과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에 안 됐죠. 객관적으로 최대한 정확하게 심사한 것입니다."

그럼 2차 심사는 어땠을까.

재심 위원은 공무원 3명과 변호사 3명, 의사 3명.

9명이 참여했지만 직업 환경과 질병 관계를 연구하는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없었습니다.

[A씨/ 당시 공무원연금급여재심위원회 위원]
"외과 있고, 내과 있고, 정형외과 있고… 대개 그런 식으로 구성됐죠."

[최주현 기자]
2시간 동안의 재심에서 안건에 올라가는 사례는 보통 130여 건.

한 건을 다루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희귀질환은 심의가 어렵기 때문에 아예 소송을 내라며 부결시키기도 합니다.

[B씨/ 당시 공무원연금급여재심위원회 위원]
"희귀질환 같은 경우나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할 것인 것은 부결을 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9·11 테러 때 많은 소방관들을 잃었던 미국은 우리와 반대로 질병과 업무 사이에 관련이 없다는 점을 국가가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 국회도 두 달 전 비슷한 법안을 발의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습니다.

[안연순/ 동국대학교 일산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근본적으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질병이 너무나 많잖아요. 연구 결과가 없는 것인데, (공상이)아니라고 해석하는 게 많은 거예요."

오늘도 소방관들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채널A 뉴스 최주현입니다.

최주현 기자(choigo@donga.com)

글 구성-전다정 장윤경
영상취재-박재덕
영상편집-김지균
그래픽-김민수 양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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