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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깊은뉴스]“술김에 실수”…면죄부 된 ‘주취감경’
2017-12-20 19:41 사회

우리는 술에 관대했습니다.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 좀 봐 주자'...

이런 생각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형량도 줄여주는 이른바 '주취감경' 조항까지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전혜정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송년회로 흥청대는 유흥가.

밤이 깊어지자 경찰도 바빠집니다.

[현장음]
"나 술 안 취했어요."

거나하게 취한 남성이 택시 기사와 실랑이를 벌입니다.

[현장음]
"차후 이야기이고. 그건 차후 이야기이고. 내가 왜 업무를 방해했는지 여경이 이야기 해보세요."

바로 옆에서는 만취한 중년 여성들이 경찰관에게 행패를 부립니다.

[현장음]
"뭘 봐, 뭘 봐."

119 구급대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지만, 응급실에서도 한바탕 소동을 벌입니다.

[현장음]
"아까 그 ○○ 어디갔어. 놔 봐~"

바쁜 119와 경찰이 만취객 수송에 투입된 셈이지만, 취객들은 대부분 입건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지은 / 서울 연신내 지구대장]
"보통 술에 많이 취해 있거나 하면 보호자를 부릅니다. 그럴 경우 보호자들은 '저희 아이가 술이 취해서 그렇다, 원래 안 이런데 좀 봐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십니다."

문제는 이렇게 취하면 더 큰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경찰 공무 집행 방해로 입건된 10명 중 7명은 술에 취한 상태였습니다.

살인범과 성 범죄자의 3분의 1 가량이 술에 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처벌은 어떨까.

30대 남성 박모 씨는 2년 전 취객에게 맞아 숨진 형만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박모 씨 / 주취 범죄 피해자 동생]
"달려가서 솔직히 똑같이 만들어주고 싶어요."

박씨의 형은 노래방에 들렀다 처음 본 취객들에게 폭행 당했습니다.

[전혜정 기자]
"이곳에서 집단폭행을 당한 박씨는 뇌사 상태에 빠졌다, 결국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박씨를 폭행한 가해자들은 징역 3년의 짧은 형을 마친 뒤 내년이면 출소합니다."

검찰이 구형한 형량은 징역 9년.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범죄라며 훨씬 낮은 형을 선고한 겁니다.

[박모 씨 / 주취 범죄 피해자 동생]
"어이가 없었죠. 사람을 죽이고도 3년이라고 하는 게 어이가 없고. 판사 자기 아들이 설령 이렇게 당했어도 똑같이 감경해서 3년을 내렸을지…"

감형의 근거는 법 조항에 있습니다.

심신장애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감형할 수 있도록 규정했는데, 술에 취한 상태도 심신 장애 상태로 보고 있습니다.

이 형법 10조는 8살 난 여자 어린이를 무참히 성폭행한 조두순이 징역 12년만 선고받은 판결의 근거가 됐습니다.

조두순을 검거한 형사는 지금도 조두순이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대역]
"제가 안 했어요. 저는 거기 간 적도 없고, 성폭행한 사실도 전혀 없어요."

처음에 조두순은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이도근 / 안산단원경찰서 형사]
"조두순 같은 경우는 명확한 물증을 제시해도 중형이 선고될 걸 예상하고 끝까지 범행 사실을 부인했어요."

그러나 현장에서 지문이 발견되자 술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대역]
"(술을) 혼자 먹었어요. 술을 먹었으니 어디 갔는지 전혀 기억도 안 나요."

조두순은 3년 뒤 출소합니다.

조두순 출소와 '주취감경'에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에는 83만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이도근 / 안산단원경찰서 형사]
"진짜 모든 형사들이 이 범인은 꼭 반드시 검거해야 되겠다는 그런 의지가 강했죠. 최대한 중형을 선고 받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죠. "

그러나 청와대도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조 국 / 청와대 민정수석]
"술을 마시고 싸워서 서로 폭행이나 상해를 입힌 경우가 발생합니다. 무조건 엄벌해야 하는지, 그런 사람이 합의한 경우도 감경시키지 말아야 하는지 이런 문제가 발생 합니다. "

젊은 시절, 주폭으로 유명했던 손광호 목사.

[손광호 / 목사(알코올중독퇴치 국민운동본부)]
"어느 동네에서만 말썽 부린 게 아니고 전세계를 다니면서 말썽을 부리니까 주변 사람들이 살수가 없는 거예요."

현재 '금주 전도사'로 활동중인 손 목사는 술에는 더 엄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손광호 / 목사(알코올중독퇴치 국민운동본부)]
"술로 인해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감형을 해주면 그런 악습이 반복될 수 밖에 없어요.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아노미 상태까지 가는 거죠."

미국과 영국에는 '주취 감경' 자체가 없습니다.

프랑스에선 오히려 가중 처벌을 합니다.

[프레데릭 로페롱 / 프랑스 형사정책협회 국장]
"(성폭행의 경우) 일반적으로 최고 15년형을 받지만 술을 마셨을 경우 20년입니다."

그러나 술에 관대한 우리 문화는 전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국회에서만 8차례 발의된 '주취 감경 폐지 법안들'에는 먼지만 쌓여가고 있습니다.

[허윤 / 변호사]
"음주운전은 가중처벌 하면서 음주 후 벌어지는 형사적 범죄에 대해 감경 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법체계적으로 논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술김에 실수했다'는 말이 면죄부가 되던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할 시점입니다.

채널A 뉴스 전혜정 입니다.

전혜정 기자 hye@donga.com
연출 김남준
글·구성 전다정 장윤경
그래픽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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